사건의 배경
2015년 11월, A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한화캐피탈 직원”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고객님의 신용등급을 올려야 대출이 가능합니다.
저희가 돈을 송금할 테니 인출해서 돌려주시면 됩니다.”
A씨는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그는 그 제안을 믿고 자신의 계좌를 이용해 송금과 인출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계좌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의 돈이 입금되는 ‘피해금 통로’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의 돈이 흘러들어왔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검찰청과 금융기관을 사칭하며 피해자들을 속였습니다.
피해자 H씨는 “대포통장 사건 조사 중”이라는 거짓말에 속아 1,900만 원을 A씨 명의 계좌로 송금했습니다.
피해자 I씨는 “통장을 검사해야 한다”는 말에 속아 1,400만 원을 보냈습니다.
A씨는 지시를 받은 대로 은행을 찾아가 현금을 인출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계좌가 보이스피싱에 사용된 정황을 포착하고,
인출 직후 A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검찰의 주장: “피해금을 인출해 준 공범이다”
검찰은 A씨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보이스피싱 조직과 공모해 돈을 인출한 공범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임을 알면서도 피해금 인출을 도왔고,
그 대가로 일정한 수익을 약속받았다.”
즉, A씨가 “이 돈이 불법 자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범행에 가담했다는 논리였습니다.
피고인의 항변: “대출 절차인 줄 알았습니다”
A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저는 한화캐피탈 직원을 사칭한 사람의 말을 믿었습니다.
대출을 받기 위한 절차라고 생각했지, 사기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신용등급을 올려야 대출이 가능하다’는 말에 속았고,
자신의 계좌로 돈이 입금된 것을 ‘대출용 거래금’으로 믿었다고 진술했습니다.
또한 그는 타인 명의의 계좌나 대포통장을 쓰지 않았습니다.
“보이스피싱인 걸 알았다면, 제 이름이 걸린 계좌를 썼겠습니까?”
법원의 판단: “범행 인식 입증 부족”
법원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A씨의 행위 자체는 인정했지만,
그가 보이스피싱임을 인식하고 가담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① 본인 명의 계좌 사용 — ‘도피 의도 없음’
법원은 이렇게 밝혔습니다.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한 사람이라면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 계좌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피고인은 자신의 실명 계좌를 사용했다.”
이는 오히려 범죄 의도가 없었다는 정황으로 작용했습니다.
② 범죄 조직과의 구체적 공모 증거 없음
A씨는 전화로만 연락을 주고받았을 뿐,
보이스피싱 조직원들과 직접 만나거나 상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법원은 “금전 거래와 관련된 명확한 대가 약속이나
범죄 공모를 입증할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③ 수고비 약속도 ‘범행 인식’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A씨에게 “수고비 5%를 주겠다”고 했지만,
법원은 이것만으로는 범행 인식을 단정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피고인이 범행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결론: “의심만으로는 유죄라 할 수 없다”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했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A씨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건의 의미
석원재 변호사
이 사건은 보이스피싱 인출책으로 오해받은 피고인의 사례입니다.
법원은 “단순히 피해금을 인출했다는 이유만으로
사기 공모의 고의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즉, ‘의심’이 아니라 ‘확실한 인식’이 입증되어야만 유죄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