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만 맡았을 뿐인데 보이스피싱 방조로… 법원 “범죄 인식 없어 무죄”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여권을 며칠간 보관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남성,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여권 보관은 범행의 필수 조력 아냐, 범죄 인식 입증도 부족”
Oct 23, 2025
여권만 맡았을 뿐인데 보이스피싱 방조로… 법원 “범죄 인식 없어 무죄”

사건의 시작

2020년 가을, 한 남성 A씨는 지인으로부터 이상한 부탁을 받았습니다.

“잠시 여권 두 개만 맡아달라. 며칠만 보관해주면 된다.”

그 부탁을 한 사람은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인물 B였습니다.

A씨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며칠 후 실제로 외국인 두 명이 A씨를 찾아와 여권을 건넸습니다.

그들은 방글라데시 국적의 남성들이었고, 모두 한국에서 ‘현금수거책’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A씨는 여권을 맡아두었다가 일주일 뒤 다시 돌려줬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그 외국인들은 피해자 집에 침입해 보이스피싱 피해금 수천만 원을 절취한 혐의로 검거되었습니다.


검찰의 주장: “여권 보관도 범죄의 공모 행위다”

검찰은 A씨가 단순히 여권을 맡아준 것이 아니라,
보이스피싱 조직의 범행을 용이하게 한 ‘방조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A씨가

  • 여권을 보관함으로써 수거책들이 도주하지 못하게 도와주었고,

  • 여권을 맡긴 시점과 범행 시점이 겹친다는 점을 근거로
    절도·주거침입·건조물침입 방조죄를 적용했습니다.

검찰은 “피고인이 최소한 이들이 보이스피싱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협조했다”고 보았습니다.


피고인의 항변: “그냥 부탁받아 맡아준 것뿐입니다”

A씨는 재판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저는 단순히 지인 부탁으로 여권을 맡아줬을 뿐입니다.
이게 범죄와 관련된 일이라고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오히려 여권을 맡기 전, 쌍둥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보이스피싱이면 큰일 나는 거 아니냐?”
형은 “그건 아닐 거야”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에 안심한 A씨는 여권을 며칠간 맡아두었다가
외국인들에게 그대로 돌려줬습니다.


법원의 판단: “보관 행위만으로는 방조라 보기 어렵다”


법원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A씨의 행위를 “보이스피싱 범죄를 도운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① 여권 보관은 범행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

재판부는

“여권을 맡아준 행위가 절도나 주거침입 범행의 성공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고 명시했습니다.

즉, 여권이 없어도 외국인들이 범행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필요불가결한 도움’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② 피고인은 ‘범죄 인식’을 하지 못했다

A씨는 지인 B의 부탁을 받고도 의심이 들어,
쌍둥이 형에게 “보이스피싱 관련된 일 아닐까?”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럼에도 형이 “아니다”라고 답하자 그대로 맡았던 사실이 인정됐습니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피고인이 보이스피싱 조직과 관련된 범죄임을 인식하거나 용인했다고 보기 어렵다.”
고 판단했습니다.

③ 다른 조직원들과의 ‘공모 관계’도 증명되지 않았다

A씨가 여권을 맡게 된 경로를 살펴보면,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B’였고,
A씨는 단순히 B의 부탁으로 일시적으로 여권을 보관했을 뿐입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조직원들과 공모했거나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결론: “범죄 증거 불충분, 무죄”

결국 법원은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따라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또한 형법 제58조 제2항에 따라 무죄판결의 요지를 공시했습니다.


 사건의 의미

석원재 변호사

이번 판결은 보이스피싱 관련 사건에서 ‘방조의 범위’를 엄격히 제한한 사례입니다.

최근 보이스피싱 사건에서는
계좌 명의자, 현금 수거책, 서류 전달자, 숙소 제공자 등
다양한 ‘주변인’들이 공범으로 기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단순히 여권을 보관해 준 행위는
범행의 실질적 도움으로 보기 어렵고,
고의가 입증되지 않는 한 방조로 처벌할 수 없다.”

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즉, ‘범죄 가능성을 몰랐던 사람’과 ‘알고 도운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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