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시작
2016년 9월, 서울의 한 남성 A씨는 구직 사이트 에 이력서를 올려 두었습니다.
며칠 뒤,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계좌로 들어오는 물품대금을 인출해 우리 직원에게 전달해 주시면
거래금액의 5%를 수당으로 드리겠습니다.”
보통의 단순 입금·전달 아르바이트처럼 보였고, A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그의 계좌로 1,690만 원이 입금됐습니다.
보낸 사람은 수사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속은 피해자 C씨였습니다.
A씨는 조직원의 지시에 따라 돈을 인출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습니다.
결국 그는 보이스피싱 사기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검찰의 주장: “불법임을 알고도 범행을 도왔다”
검찰은 A씨가 단순한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보이스피싱 조직의 자금 인출책으로 범행을 방조(도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검찰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습니다.
과거 A씨가 자신의 통장을 타인에게 빌려줘 처벌받은 전력이 있음.
실제로 피해금이 본인 계좌로 입금되는 이상, 범죄임을 알 수 있었음.
직접 조직원을 만나지도 않은 채 고액의 수당을 약속받은 점에서 충분히 의심할 만했음.
즉, A씨가 “이 일이 불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필적으로 인식하고도
그 일을 계속했다는 논리였습니다.
피고인의 항변: “단순한 물품대금 전달 아르바이트였습니다”
A씨는 재판에서 일관되게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저는 물품대금을 대신 전달해주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회사 ‘E’라는 사람과 통화했고, 5%의 수수료를 준다는 말을 믿었어요.
제 계좌가 범죄에 쓰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A씨는 평범한 구직자였고,
업무의 세부 내용을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고객의 물품대금을 대신 전달하는 일”이라 믿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법원의 판단: “의심했더라도 고의 입증은 부족하다”
서울동부지방법원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A씨의 행위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가 보이스피싱 범행임을 인식하거나 용인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① 방조의 고의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필요
법원은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며 이렇게 밝혔습니다.
“방조범이 성립하려면 정범이 범행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 실행을 용이하게 하려는 고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고의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되어야 한다.”
즉, 단순히 ‘의심이 들었다’는 사정만으로는
방조의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 “보이스피싱 조직에 이용당했을 가능성 크다”
법원은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했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은 구직자를 속여 범행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피해자뿐 아니라 범행보조자조차 기망당할 가능성이 크다.”
즉, A씨도 단순히 속아서 이용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입니다.
③ “행동이 불법을 인식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다”
법원은 A씨가
직접 조직원을 만난 적이 없고,
이 일로 실제 큰 이득을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피해자에게 800만 원을 변제하는 등 손해를 입은 점을 고려했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사기 범행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이러한 결과를 예견했을 것이므로, 쉽게 가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론: “의심만으로 유죄라 할 수 없다”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습니다.
“피고인이 자신의 행위가 보이스피싱 사기와 관련된 것임을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고,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고의가 합리적 의심 없이 입증되지 않았다.”
결국 A씨는 사기방조 혐의 무죄를 선고받았고,
피해자의 배상명령 신청도 각하되었습니다.
사건의 의미
석원재 변호사
이 사건은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아 이용된 구직자형 피해자에 대한
법원의 신중한 접근을 보여줍니다.
최근 구직자, 아르바이트생, 해외취업자 등을 속여 범죄에 이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범죄임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