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건의 시작 — ‘조합장 비방 현수막’
2020년 12월, 대구의 한 미용실 건물 외벽에
이런 문구의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거짓말, 돈 뿌린 것 다 들통났다.
조합장은 손해배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이 현수막을 단 사람은 B,
미용실의 주인은 A,
그리고 현수막의 대상은 G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장 E였습니다.
E는 “허위사실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고소했습니다.
2. 공소 내용 — “비방 현수막 방조”
검찰은
B에게는 명예훼손죄
A에게는 명예훼손방조죄를 적용했습니다.
A가 현수막이 자신의 건물 벽에 걸린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 두어 B의 명예훼손 행위를 용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3. 법원의 판단
① 피고인 B — 처벌불원으로 ‘공소기각’
피해자 E는 재판 중 “더 이상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법원은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6호(피해자의 처벌불원)에 따라
B에 대한 공소를 기각했습니다.
② 피고인 A — “현수막을 철거할 법적 의무 없다”
A가 실제로 현수막 내용을 알고 있었던 점은 인정됐습니다.
A는 수사기관에서 “현수막 내용이 사실이라 생각했고,
조합원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렇게 판시했습니다.
“이 사건의 공소사실은 A가 현수막 설치를 공모하거나 직접 방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B가 설치한 현수막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작위에 의한 방조범’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A가 법적으로 현수막을 제거할 작위의무를 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럴 근거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4. 부작위범의 성립 요건
법원은 형법상 부작위범의 요건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법익침해의 결과를 방지할 작위의무를 지닌 자가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결과발생을 용인한 경우에 한해 부작위범이 성립한다.”
하지만 A는 B가 임의로 설치한 현수막에 대해
이를 직접 철거해야 할 법적·계약상 의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함부로 철거했다가는 오히려 재물손괴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었죠.
5. ‘내심 동조’와 법적 책임은 별개
법원은 또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A가 현수막의 내용에 내심 동조했다고 해서
철거 의무가 새로 발생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무관심하면 의무가 없고, 동조하면 의무가 생긴다는 건 불합리하다.”
즉, ‘찬성하는 마음’과 ‘법적 책임’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6. 결론 — “범죄의 증명이 없다”
재판부는 “A가 B의 명예훼손 행위를 방조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따라
A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7. 판결의 의미 — “방조와 부작위의 경계”
석원재 변호사
이 사건은 부작위(행동하지 않음)로 인한 방조범 성립 요건을 명확히 한 판례입니다.
법원은 “타인이 저지른 명예훼손 행위를 알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해서
바로 방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법적 작위의무가 없는 이상, 부작위에 대한 형사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