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건의 시작 — “봉투에서 마약이 나왔다”
2017년 경산의 한 원룸.
경찰은 신고를 받고 원룸을 수색하다가 싱크대 찬장 위에서 약국 봉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봉투에는 피고인 A씨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필로폰 3.79g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와 주사기 여섯 개가 나왔습니다.
수사기관은 즉시 “A씨가 이곳에 마약을 숨겨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검찰은 그가 마약류취급자도 아닌데 필로폰을 소지했다며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향정)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2. 피고인의 항변 — “수면제 봉투일 뿐입니다”
A씨는 재판 내내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저는 B씨의 부탁으로 필로폰을 구해달라는 말을 들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주사기와 비닐봉지를 보여주기에,
‘이런 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A씨는 문제의 약국 봉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B가 잠을 못 잔다길래,
제 차에 있던 약국 봉투에 수면제 두 알을 넣어 준 것뿐이에요.
마약은 본 적도 없습니다.”
3. 1심의 판단 — “유죄”
1심 법원은 B씨의 진술을 믿고, A씨에게 징역 1년과 몰수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A씨는 항소했습니다.
“B의 진술은 엇갈리고 믿을 수 없습니다.
약국 봉투 속 마약이 제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4. 항소심 법정 — ‘약국 봉투’의 진실을 파헤치다
대구지방법원 제4형사부(이윤호 재판장)는 사건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근거로 검찰의 주장을 뒤집었습니다.
① 마약이 발견된 곳은 피고인의 집이 아니었다
필로폰이 발견된 원룸은 B씨의 주거지였습니다.
피고인이 아닌 제3자의 공간에 있었던 마약이 피고인의 소유라고 보려면,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B씨의 진술만이 유일한 근거였지만, 그 진술은 스스로 모순투성이였습니다.
② 핵심 증인 B의 진술은 계속 바뀌었다
B씨는 수사 초기에 “A씨가 직접 마약을 놓고 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마약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대질신문에서는 “경찰이 들어올 때 처음 봤다”고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사건 직후 경찰에 전화를 걸어
“생각해보니 (A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마약을 두고 간 것 같다”
고 말한 사실도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B씨는 제3자에게 “빈방에 마약을 숨겨놨다고 하더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법원은 이런 정황을 종합해
“B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③ 현장이 오염됐을 가능성
경찰이 출동하기 전, B와 그의 지인이 이미 원룸에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경찰이 오기 전부터 마약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었고,
직접 경찰에게 “이곳을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경찰관의 증언에 따르면,
“신고자가 찬장 위를 가리키며 직접 봉투를 꺼냈다.”
즉, 경찰 도착 전 현장이 이미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④ 봉투의 상태와 내용물의 불일치
B씨는 “약국 봉투 안에 주사기와 담뱃갑, 비닐봉지가 들어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실제 수거 당시 사진을 보면 봉투는 납작하게 접혀 있었습니다.
법원은 “그런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면 부풀어 올랐어야 한다”며
‘약국 봉투 안에서 마약이 나왔다는 진술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⑤ 지문·마약 반응, 모두 불검출
피고인의 모발과 소변에서는 필로폰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마약이 그의 손을 거쳤다는 물리적 증거도 없었습니다.
필로폰 봉투나 주사기에서도 피고인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5. 법원의 결론 — “의심은 있어도 증거는 없다”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시했습니다.
“피고인이 필로폰을 원룸에 두고 나왔다는 공소사실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이 증명되지 않았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하기 어렵다.”
결국 법원은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따라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또한 형법 제58조 제2항에 따라 무죄 판결 요지를 공시했습니다.
6. 사건의 의미 — “의심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석원재 변호사
이 사건은 ‘의심은 있으나 증거는 불충분할 때는 무죄’라는
형사재판의 기본 원칙을 다시 확인한 판례로 평가됩니다.
법원은 명확히 말했습니다.
“B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고,
약국 봉투 안에 마약이 있었다는 객관적 증거도 없다면,
피고인을 유죄로 처벌할 수 없다.”
결국, ‘증거의 불충분’이 ‘무죄’의 이유가 된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