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국에서 벌어진 해프닝
1992년 2월 11일, 안양시의 한 의약품 도매업체 사무실.
대표이사 A씨는 거래처인 영진약품으로부터
코디푸로시럽(500ml) 5병을 구입했습니다.
이 시럽은 일반 의약품이 아니라 엄격한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문제는, 거래 후 A씨가 판매장부에 그 사실을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검찰은 즉시 이를 마약법 제46조의2 제1항 위반으로 보고 기소했습니다.
2. 검찰의 주장 — “구입도 기재해야 한다”
검찰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한외마약은 판매뿐 아니라 구입도 관리 대상입니다.
따라서 도매업자는 구입 사실을 장부에 써야 하는데,
이를 기재하지 않았으므로 법 위반입니다.”
A씨는 법인 대표로서 마약류 취급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검찰은 회사인 피고인 법인에도 양벌규정을 적용해 함께 기소했습니다.
3. 피고인의 반박 — “법 조항을 잘 보십시오”
A씨의 변호인은 조문을 근거로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마약법 제46조의2 제1항은
‘한외마약을 판매할 때 장부를 작성·비치하고 판매 내용을 기재하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구입할 때’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즉, ‘판매 장부 미기재’ 조항은 판매자에게만 적용되고,
구입자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라는 주장입니다.
4. 법원의 판단 — “조문은 명확하다”
수원지방법원 형사단독(박정헌 판사)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약법 제46조의2 제1항은
약국 개설자나 의약품판매업자가 한외마약의 판매에 관한 장부를 작성하고,
판매 시 그 내용을 기재하며 매수인의 날인을 받도록 규정한다.”
또한, 같은 법 제66조 제2호는 위 규정을 위반한 자에게
1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제71조는 법인의 대표자에게도 동일한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 규정이 오직 ‘판매 행위’에만 적용된다고 명확히 해석했습니다.
5. 판결 요지 — “구입 미기재는 처벌 불가”
법원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한외마약을 판매한 경우, 판매장부를 작성·비치하지 아니하거나
‘판매’ 내용을 기재하지 않은 행위가 처벌 대상이다.
반면, 한외마약을 구입한 경우 ‘구입’ 내용을 기재하지 않은 행위는 해당하지 않는다.”
결국, 형사소송법 제325조 전단(피고사건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때)에 따라
A씨와 법인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또한 형법 제58조 제2항에 따라 무죄 판결 요지를 공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6. 판결의 의미 — “형벌은 명문법에 따라야 한다”
석원재 변호사
이 판결은 마약류 관리의무 위반죄의 적용 범위를 엄격히 제한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법원은 “명문의 규정이 없는 부분까지 확장해 해석할 수 없다”는
형사법의 대원칙,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를 재확인했습니다.
“마약류 취급과 관련한 규제라 하더라도,
처벌은 법이 명시한 행위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결국, 단순한 ‘행정상의 착오’로 여겨졌던 사건은
‘법적 해석의 경계’를 명확히 한 판례로 남게 되었습니다.